2025년 5월,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연구전략을 살펴보면서 ‘버려진 열이 다시 살아나는 시대’가 현실임을 느꼈다.
한국은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나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낭비되는 에너지’는 세계 상위권이다.
산업단지, 발전소, 도시 인프라에서 매년 버려지는 열만
무려 14조 kcal 이상, 서울시 전체 난방 수요의 두 배에 해당한다.
이 막대한 에너지가 지금, 다시 깨어나고 있다.

산업 현장은 이제 ‘보이지 않는 발전소’로 변모하고 있다.
먼저 포항제철(POSCO) 은
용광로 배기열을 이용한 폐열 발전 시스템을
이미 10여 년 전부터 가동 중이다.
약 900℃에 달하는 고온 가스를 열교환기를 통해 회수해
증기 터빈을 돌려 전력을 생산한다.
이 한 설비만으로 연간 40만 MWh의 전력을 만들며,
이는 포항시 전체 가구가 한 달 동안 사용할 전력과 맞먹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저온 폐열(100℃ 이하) 도 전기로 바꾸는
TEG(열전 발전) 기술이 산업 현장에 실증 도입되고 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은
포항공대와 협력해
철강 공정의 배기가스관 외벽에
나노소재 기반 열전 모듈을 부착했다.
이 모듈은 온도차 80℃만으로도 전류를 생성하며,
기존 폐열 회수 장치 대비 유지비가 70% 낮다.
현재 시범설비에서 생산된 전력은
모니터링 시스템과 현장 센서 전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산업 현장은 전력을 ‘받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미세 발전소가 되고 있다.”
— KIER 연구소 관계자
도시는 산업보다 더 많은 열을 낭비한다.
특히 지하철은 대표적인 ‘저온 폐열의 보고(寶庫)’ 다.
수백만 명의 승객과 전동차에서 발생하는 열이
공기 중으로 방출되며 막대한 에너지가 사라진다.
서울교통공사는 2024년부터
‘지하철 환기구 열 회수 시스템’ 을
1~9호선 주요 역사에 확대 도입했다.
겨울철에는 객차와 터널 공기의 온도를 모아
역사 외부의 공기를 예열하고,
여름철에는 공조 효율을 높여 냉방 부하를 줄인다.
또한 일부 역사에는
공기-물 열교환기와 TEG 모듈을 결합한
‘복합 폐열 발전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이 패널은 환기구 온도차를 이용해
1일 약 5~10kWh의 전력을 생산하며,
조명·CCTV 전원으로 사용된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탄소중립도시 2040 로드맵의 핵심 인프라로 지정되었다.
AI 시대의 심장, 데이터센터 역시
새로운 에너지 순환의 거점으로 부상했다.
경기도 춘천에 위치한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閣)’ 은
서버에서 발생하는 열을 회수해
인근 건물 난방과 온수에 재사용한다.
이 시스템은 연간 1만6천Gcal의 열을 회수하며,
이는 가정용 보일러 4,000대가 사용하는 에너지와 같다.
카카오 데이터센터 안산캠퍼스는
냉각수의 온도차를 이용해
TEG 모듈 기반 ‘미세 전력 회수 시스템’ 을 시범 적용 중이다.
이 전력은 센서 네트워크와 모니터링 서버 구동에 쓰이고 있으며,
추후에는 재생에너지와 연계해
‘탄소 제로 데이터센터’ 모델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처럼 산업, 도시, IT 인프라가
모두 ‘버려진 열’을 다시 에너지로 돌려보내는 순환 구조로 바뀌고 있다.
이는 단순히 효율을 높이는 수준이 아니다.
산업 전체의 철학, 즉 ‘에너지의 존재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현상이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에너지를 외부에서 ‘채굴’하고 ‘수입’하는 구조였다.
석유를 파내고, 가스를 수입하며, 전력을 송전받았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는 늘 ‘소비재’로 취급되었고,
사용 후에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폐열 회수 기술의 등장은
이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제 에너지는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되는 것,
그리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인식된다.
예를 들어, 제철소의 배기열이 공장의 센서를 움직이고,
데이터센터의 폐열이 도시의 난방으로 흘러가며,
지하철의 열이 시민의 온수를 데운다.
즉, 한 산업의 ‘부산물’이 다른 산업의 ‘연료’로 전환되는
에너지 생태계의 순환 고리가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산업은 더 이상 “에너지를 소비하는 체계” 가 아니라
“에너지를 재생산하는 생명체” 로 작동하게 된다.
공장은 스스로 열을 회수하고,
도시는 그 열을 저장하며,
AI는 그 에너지 흐름을 관리한다.
이는 곧 ‘기술의 생명화(Biologization of Technology)’,
즉 기술이 자연의 순환 원리를 닮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열은 폐기물이 아니라, 순환의 시작점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산업은 점점 ‘자급형 생명 구조’로 진화한다.
이 변화의 핵심은 효율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의 전환이다
에너지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잃지 않는 사회로 이동하는 것.
한국의 폐열 기술이 의미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절감 기술이 아니라,
“버려진 에너지를 생명력으로 되살리는 산업 생태계” 를 만들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제 산업은 기계를 돌리기 위해 열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열을 돌려보내며 기술과 생명의 경계를 허무는 순환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순환형 에너지 기술’의 테스트베드
한국은 자원은 부족하지만 기술력은 강하다.
폐열 회수, 열전 발전, AI 기반 열관리 시스템은 그 강점을 증명한다.
향후 10년 내 한국이 ‘순환형 에너지 도시 모델’을 완성한다면,
이 기술은 아시아 전역으로 수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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