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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속의 배터리 — 해양 에너지 저장 기술이 열어가는 미래

지속가능한 과학기술

by smart-universe 2025. 10. 2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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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남아돈다.
그리고 동시에 부족하다.
이 모순된 문장은 바로 오늘날 재생에너지의 딜레마를 설명한다.

낮에는 태양이 넘치고, 밤에는 사라진다.
바람이 불면 전력이 폭증하고, 멈추면 발전이 중단된다.
이 불안정한 에너지 흐름을 안정화하는 핵심 기술이 바로 ‘에너지 저장(ESS, Energy Storage System)’ 이다.

그런데 이제 과학자들은 새로운 공간에 눈을 돌렸다.
바로 ‘바다’,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거대한 에너지 저장소다.

 

바다 속의 배터리 — 해양 에너지 저장 기술이 열어가는 미래

 바다 속 배터리란 무엇인가

‘해양 에너지 저장 기술(Ocean Energy Storage)’은
해저의 수압을 이용해 전기를 저장하고 다시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바닷속 압력을 거대한 배터리로 활용하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방식은 ‘압축 공기 해저 저장 시스템(Underwater Compressed Air Storage)’이다.
육상에서 남은 전기를 이용해 공기를 압축하고,
그 공기를 해저의 돔(dome) 형태 저장소에 주입한다.
이후 전력이 필요할 때 압축 공기를 방출하면서
터빈을 돌려 다시 전기를 생산한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중력과 수압이다.
바다의 깊이는 수백 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해저에 저장된 압축 공기는 육상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해저 배터리 실험’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같은 유럽의 해양 강국들은
이미 2023년부터 해저 배터리 실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노르웨이의 Subhydro사는
100m 수심의 해저에 ‘콘크리트 돔형 배터리’를 설치하고,
1,000kWh급 전력 저장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돔은 직경 10m의 구체 형태로,
압축된 공기를 내부에 저장해 약 200가구가 하루 동안 쓸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이 프로젝트를
‘Next Generation Energy Storage Initiative’의 핵심 기술로 선정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 추가 토지가 필요 없고,
  • 풍력·조력 발전소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 수압 덕분에 별도의 대형 배터리 소재(리튬, 코발트 등)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해저 압력, 리튬을 대체하다

현재의 배터리 기술은 대부분 리튬과 코발트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광물들은 채굴 과정에서 환경파괴와 인권 문제가 크다.

해저 에너지 저장 기술은
화학 반응이 아닌 물리적 압력과 공기 흐름을 이용한다.
즉, 원자재 채굴 없이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수온 변화가 적은 해저 환경은
지상보다 온도 안정성이 높아 에너지 손실이 적다.
이는 곧 유지비 절감과 장기적 효율 향상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실험 — 동해안 해저 저장소 구상

한국 역시 이 신기술을 단순한 이론이 아닌 실제 산업 프로젝트로 옮기려는 단계에 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은 2025년부터 본격적인 ‘해양 압력 기반 에너지 저장 파일럿 시스템(Undersea Pressure-Based ESS)’ 구축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정부의 탄소중립 기술개발 사업(Zero Carbon Tech Initiative) 과 연계되어 진행되며,
전력거래소(KPX)·한국전력기술·포항공대 해양플랜트연구단이 공동 참여한다.

실증 장소로는 경북 울진 앞바다 약 120m 수심 지역이 검토되고 있다.
이곳은 해류가 안정적이고, 수심 대비 수온 변화가 적어 압축 공기 저장에 유리하다.
연구진은 직경 8m 규모의 돔형 해저 저장 구조물(Underwater Air Dome) 을 설치해
육상에서 발전된 남는 전력을 압축공기 형태로 저장하고,
필요 시 터빈을 구동해 다시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을 실험할 계획이다.

이 시스템은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니다.
해상풍력, 조력, 태양광 발전 등 변동성 높은 재생에너지의 완충 장치 역할을 수행한다.
즉, 전력 수요가 낮을 때 바다에 전기를 ‘저장’하고,
수요가 급증할 때 다시 ‘꺼내 쓰는’ 자연 순환형 인프라다.

한국의 전력 구조는 수도권과 남부 지역의 발전 비중 차이로 인해
지역별 공급 불균형이 잦은 편이다.
특히 제주, 전남, 서남해안권은 풍력·태양광 발전소가 집중되어 있어
낮 시간대에 잉여 전력이 대량 발생하지만,
이를 저장할 마땅한 시스템이 없어 송전선 차단이나 발전 중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해저 배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땅 위에 대형 배터리를 세우기 어렵고,
기존 ESS는 설치비가 높으며, 화재 위험성도 존재한다.
반면 해양 압력 기반 저장 시스템은

  • 토지 점유가 없고,
  • 리튬·코발트 등 희귀 광물이 필요하지 않으며,
  • 자연 수압을 이용하기 때문에 폭발 위험이 거의 없다.

KIER의 목표는 파일럿 단계를 넘어
2030년까지 10MWh급 상용 해저 에너지 저장소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내 재생에너지 비중을 안정적으로 확대하고,
국가 전력망에 ‘해양형 버퍼(Buffer)’를 추가하는 것이 장기적 비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술이 단지 에너지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저 인프라 구축을 위한 심해 로봇, 수압 센서, 해양 구조물 설계 기술이 함께 발전하면서
국내 해양기술 산업 전반의 혁신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즉, 해저 배터리는 재생에너지 안정화 기술이자, 해양 산업의 새로운 성장축인 셈이다.

지속가능한 에너지의 진화 방향

해양 저장 시스템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압력과 순환 원리를 기술로 번역한 시도다.

바다는 이미 수억 년 동안
에너지와 열을 흡수하고, 방출하고, 순환시켜왔다.
이제 인간은 그 메커니즘을 모방해
“자연의 방식으로 에너지를 저장하는 문명” 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 방식은
리튬, 코발트, 니켈 등 고갈 위험이 큰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체계로의 전환을 가속화한다.

결론 — 기술이 자연을 닮을 때

바다 속 배터리는 아직 실험 단계다.
하지만 그 철학은 명확하다.

기술은 더 이상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연의 리듬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

해저의 압력, 조류의 흐름, 해양의 온도 차 —
이 모든 요소는 이미 완벽한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이제 인간의 역할은 그것을 모방하고,
과학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바다 속의 배터리는
단지 전기를 저장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설계한 에너지 철학” 의 구현이며,
지속가능한 문명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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