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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플라스틱에서 나일론으로 – 미생물이 만드는 신소재 혁명

지속가능한 과학기술

by smart-universe 2025. 10. 15.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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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플라스틱이 고급 나일론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문장은 몇 년 전만 해도 공상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실험실이 아닌 실제 산업 현장에서
조용히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주인공은 바로 미생물입니다.

플라스틱을 분해하던 미생물들이
이제는 단순한 청소부를 넘어,
새로운 산업 소재를 만들어내는 생명공학적 생산자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기술이 바로 Microbial Upcycling,
즉 미생물 기반 업사이클링입니다.

 

폐플라스틱에서 나일론으로 – 미생물이 만드는 신소재 혁명

 

1단계: 플라스틱 분해, 새로운 탄소의 시작

 

이 모든 과정은 분해에서 시작됩니다.
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은
테레프탈산(TPA)과 에틸렌글리콜(EG)이라는 두 가지 주요 구성 성분으로 나뉩니다.
PETase와 MHETase 같은 효소들이
이 복잡한 사슬 구조를 절단하면,
미생물은 이 조각들을 에너지원으로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여기서 과정이 끝났습니다.
“플라스틱이 사라졌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해된 탄소를 새로운 물질로 바꿀 수는 없을까?”

이 질문이 폐플라스틱을 나일론으로 변환하는 연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2단계: 미생물의 대사 경로가 ‘합성 공장’으로 바뀐다

 

미생물은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화학자입니다.
그들은 흡수한 TPA를 세포 내에서
여러 단계의 효소 반응을 거쳐 카복실산, 지방산, 아민 화합물 등으로 변환시킵니다.

여기서 대사 경로(Metabolic Pathway) 를 조정하면
TPA에서 파생된 탄소 사슬을 원하는 형태로 재배열할 수 있습니다.
이 기술을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 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 Pseudomonas putida 는 TPA를 흡수한 뒤
    내부 대사 과정을 통해 아디프산(adipic acid) 과
    1,4-부탄디올(1,4-butanediol) 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 이 두 물질이 결합하면
    우리가 잘 아는 나일론(Nylon 6,6) 과 유사한 구조의 고분자가 만들어집니다.

즉, 미생물은 플라스틱의 ‘쓰레기’를 먹고
고급 섬유 원료를 토해내는, 살아있는 분자 재조립 공장이 된 셈입니다.

 

3단계: 폐플라스틱이 ‘신소재’로 바뀌는 산업 혁신

 

이 연구는 더 이상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세계 각국의 연구소와 기업들이
이 기술을 산업용 스케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 프랑스의 카르비오스(Carbios) 는 PETase 효소를 이용해
    플라스틱 병을 하루 만에 원료로 되돌리고,
    그 부산물로 섬유용 나일론을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 미국 NREL(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 연구진은
    Pseudomonas 균주를 개량해
    PET 분해산물을 고무, 나일론, 윤활유 원료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한국의 KAIST·포스텍 공동 연구팀 역시
    PETase와 인공 효소를 결합한 시스템으로
    폐플라스틱에서 바이오나일론 전구체를 생산하는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이 모든 연구의 공통점은 단 하나,
“분해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물질로 창조한다”는 점입니다.

 

4단계: 자연의 분해 → 인간의 합성, 그리고 그 사이의 연결점

 

기존의 화학공정에서는
석유를 고온·고압에서 처리해 나일론 원료를 얻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량의 이산화탄소와 아산화질소가 발생했고,
이는 기후변화의 주범 중 하나로 지적되었습니다.

하지만 미생물 업사이클링 공정은
상온에서 효소 반응만으로 동일한 화학 결합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즉, 탄소 배출 없이 새로운 소재를 만드는 길이 열린 셈이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공정이 ‘자연의 분해 과정’과 ‘인간의 합성 기술’이
완벽히 맞물리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분해를 담당하고,
인간은 그 부산물을 재구성해 산업적 가치로 바꿉니다.
이는 생태와 기술이 경쟁이 아닌 협력의 관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5단계: 나일론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순환경제

 

이렇게 만들어진 바이오 나일론은
전통적인 나일론보다 환경 영향을 최대 90% 이상 줄입니다.
생산 과정에서의 에너지 소모,
탄소 배출, 화학 폐수 모두 현저히 낮아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바이오 나일론 자체도 다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다음 생산 공정의 원료로 재사용될 수 있습니다.
즉, ‘플라스틱 → 분해 → 합성 → 재사용’
완전한 순환 구조가 실현되는 것이죠.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버려진 PET병 하나가 고급 의류 소재,
자동차 부품, 의료용 섬유로 다시 태어나는 세상이 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생물이 주도하는 신소재 혁명의 진짜 의미입니다.

 

6단계: 연구실에서 산업 현장으로 – 현실이 된 미생물 공장

 

미생물 업사이클링은 이제 실험실의 호기심 단계를 지나
산업 전환의 중심 기술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론적인 가능성’으로 여겨졌던 이 기술이
지금은 세계 각국의 기업 공정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고 있죠.

유럽에서는 “Bio-Loop Project” 라는 이름으로
폐플라스틱을 수거해 미생물로 분해하고,
그 부산물로 자동차용 바이오 나일론을 제조하는 대규모 공정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수의 자동차 기업들은
내장재와 시트, 케이블 피복 등에서
기존 석유계 나일론을 대체하는 데 이미 성공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스타트업 Genecis 는
음식물 쓰레기를 원료로 사용해
미생물이 PHA·나일론 전구체를 합성하는 시스템을 상용화했습니다.
이 회사는 폐기물 1톤당 약 400kg의 바이오 소재를 생산할 수 있으며,
이 공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은 기존 화학 공정보다 80% 이상 낮습니다.

한국에서도 움직임이 빠릅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이 미생물 공정 기반 순환소재 라인을 구축하며,
PET 병과 필름을 재활용해 친환경 섬유·산업용 수지를 생산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을 이용해 미생물의 대사 경로를 설계·최적화하는
AI 바이오 시뮬레이션 기술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소재를 ‘맞춤형으로 설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한 가지 제품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건축 자재, 의료 기기, 가전 부품까지
모든 산업 소재가 “미생물 공장에서 태어난 고분자” 로 바뀌게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가 매일 접하는 거의 모든 사물의 탄소 구조가
점점 ‘생명 기반’으로 재설계되고 있는 것입니다.

 

폐기물이 자원이 되는 세상

 

폐플라스틱을 없애는 것은 이제 출발점일 뿐입니다.
미생물 업사이클링은
그 쓰레기를 다시 새로운 산업 자원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미생물은 더 이상 환경의 정화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산업을 창조하는 생명 기반 공학자(Bioengineer) 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입는 옷, 사용하는 전자제품,
심지어 자동차 내부 소재까지도
이 작은 생명체들이 만든 신소재로 대체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플라스틱의 종말이 아니라,
플라스틱의 진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화의 주인공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지구가 오랫동안 품어온 미생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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